평가 시즌

연말 평가 시즌이 시작됐다. CTO를 제외한 각 팀에는 팀장이 없고, 직급이 없는 개발조직은 팀원들을 서로 평가하게끔 되어있는데, 이번 평가부터는 개인별 순위를 매기라고 하더라. 팀 성과에 기여한 개인별 순위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, 아무래도 회사에 오래 다녔거나, 연차가 많은 개발자의 기여도가 높고, 새로 입사한 사람이나 신입사원의 경우 순위가 낮을 수 밖에 없는데,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별 순위를 매겨 어느 정도 반영을 해야한다는 게 실리콘밸리 출신 CTO의 뜻이라고.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기는 한데, 대놓고 순위를 매기려니 어색한 게 사실이다. 누가 누구에게 몇 등을 주었는지 알 수 없고, 내가 몇 등을 받았는지 알려줄 것 같지는 않지만 평가를 하면서도 영 개운하지가 않다. 내가 잘한 게 얼마 없어서 그런 거겠지.

개인별 평가를 작성하는 건 사실 힘들다. 팀원 9명에 대한 평가 항목이 6-9개 정도 되고, 개인별로 코멘트를 세 개씩 작성해야 한다. 항목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이전에 작성했던 평가를 열어보게 되고, 두루뭉술하게 좋은 말 위주로 적게 된다. 이렇게 되니 개인별 평가는 사실 의미가 적어지고 팀별 평가에 의존적으로 반영이 될 거고, 팀별 평가는 팀 업무에 따라 갈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. 팀 업무는 티가 나는 게 있고 안 나는 게 있는데, 평가자가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당연하게도 티가 나는 곳에 좋은 평가가 가고 안 나는 곳에는 조금 덜 가게될 것이다. 티가 안 나는 데에는 일을 열심히 해도 티를 안 내는 경우와 티를 낼 수가 없는 업무인 경우 마지막으로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경우로 나눌 수 있겠다. 티를 내는 경우는 진짜 열심히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시로 전체 메일 쏘면서 지금 우리가 뭔가를 하고 있어요 라며 하는 척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. 아무튼 우리 팀은 티가 많이 나지 않는 업무가 대부분이라 얼만큼 좋은 평가를 받을진 미지수다. 평가자가 세심히 따져줄 것 같지도 않고.

평가는 늘 어렵고 힘들다. 어떻게 해도 서로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. 하지만, 이런 게 다음 연봉 계약의 기반이 된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.

아, 평가와 관련하여 항상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어디에 가더라도 어떤 문제가 발견되고, 그 문제를 해결한 팀은 포상이 따르고,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고 묵묵히 일을 처리한 팀들은 그냥 별 일 안 하는 팀으로 인식이 된다는 것인데 왜 이런 건지 모르겠다. 문제가 없는 팀이 높이 평가 받아야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, 조용한 팀에서 티를 내기가 어려우니 인정받기도 어려운 것일까. 내가 아는 팀 중에는 하는 일마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다른 팀에 피해를 주는 팀이 있는데, 어떻게든 문제 수습을 하고 그걸 또 전체 메일로 공유를 하고, 다른 루트로 전해들은 얘기로는 평가도 잘 나왔다고 하더라. 이런 것도 능력이라 인정해줘야 한다면 참 할 말이 없다.

무너진 자존감? 자존심?

내가 땜빵이나 하려고 SI 바닥으로 다시 온 건 아니거늘.

다음 프로젝트는 땜빵이다.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.

자괴감이 든다. 내가 필요한 게 아닌 땜빵이 필요했다는 것과 이 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사전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.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.

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쉬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. 닭장 같은 공간에서 난 뭘 하고 있는 걸까.

나는 같이 일하고 싶은 개발자인가?

몇 달 전부터 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. 최근에 내가 처한 현실-나는 왜 이런 자들과 일해야 하는가-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, 정작 나는 동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었을까라고는 그렇게 많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.

나는 회사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적어보자.

  1. 아침에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내지는 두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한다.
  2. 왠만해서는 내게 주어진 일감의 데드 라인은 지킨다.
  3. 업무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는 것 같다. 반대로, 큰 도움을 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.
  4. 딴 짓-예를 들면, 웹 서핑을 즐긴다. 업무적으로든, 아니든.-도 많이 한다. 하지만, 졸거나 잠을 자진 않는다.
  5.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정시 퇴근을 한다.
  6.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발벗고 나서서 일을 처리하기 보다는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데 능숙하다.
  7. 내가 직접 업무 분장을 하는 요령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.
  8. 업무로 알게 된 사람과는 왠만큼 친해지지 않고서야 사생활을 얘기하지 않는다. 농담도 잘 안 한다.
  9. 무분별한 업무 메일 참조, 메일 포워딩을 하지 않는다.
  10. 업무 시간 외에는 회사와 관련된 연락을 되도록이면 받지 않는다. 문자와 전화로 동시에 괴롭히며 급하다고 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안 받고, 대응도 하지 않는다.

대충 이 정도 인 것 같다. 쓰고보니 너무 자기 방어적인 것 같기도 하다.
어쨌든, 내가 만일 이런 행동양식을 가진 자와 일을 하게 되면 마음이 편할까?

위에서 말한 것 중에 내가 싫어하는 거라면 업무 시간에 딴짓 하는 것 정도랄까. 업무 시간에 딴짓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, 정말 업무로만 여덟 시간을 일하는 사람을 보고 나니 딴짓하는 걸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. 또, 몇 주 간 매일같이 어떤 사이트에 접속해서, 그 전 날에 방송된 모든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스트리밍으로 쳐다보고 있던 사람도 본 적이 있었는데, 그것도 역시 업무만 하는 사람이 주는 느낌과 다르면서도 같게-일에 좀 더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-작용했으리라. 어떤 사람은 남이 그러건 말건 무슨 상관이느냐, 네가 대신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느냐, 노력한 사람들은 언젠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, 그럴거면 팀이나 조직, 회사가 왜 있을까 싶기도 하고, 지금 내가 있는 조직처럼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고, 규모도 작은 조직이면서 평가 시스템이 거의 전무하다 한 현실에 각 조직 구성원의 근태 따위를 반영해가며 보상을 해 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도 하다.

음… 또 어쩌다가 얘기가 옆으로 새버렸네. 딴짓을 줄여야 한다는 게 핵심. 다른 사람이 뭘 하든 스트레스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는 건 옵션.

이 글은 작년 말 쯤에 조금 적어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마무리 짓게 됐는데, 계속해서 생각해봐도 나는 뭐 굳이 꼭 함께 일하고 싶다라는 느낌보다는, 함께 일해도 나쁘지 않다 정도의 평가를 받을 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. 굳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지만, 피해를 주는 일이 별로 없고, 일정도 잘 준수하는 편이고 하니까.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. (혹시라도 저를 아는 사람 중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은 아래 댓글로 남겨주셔도 지우지 않겠어요. 물론 이 곳에 오는 분들은 GCM검색으로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고, 제 지인들조차 블로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댓글이 작성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. 스팸이나 악플을 제외하고 그 어떤 댓글이 달려도 지우지 않겠어요.)

결론은, 내가 남들에게 함께 일하고 싶은 개발자로 남으려면, 내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개발자들이 하는 짓들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. 말을 한 두 번 정도 꼬니까 헷갈리는데, 내가 싫어하는 짓을 스스로가 안 하면 된다는 거다. 그거면 된다고 본다. 보름이나 지나서 작년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느낌이 드는 게 뭔가 새 출발을 다짐하는 날 아침같다. 하하하.